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반쪽짜리 십자가 / 십자가 고난의 완성
    Bible 2020. 5. 20. 13:58

     

    반쪽짜리 십자가

     

    예수가 내 안에, 신앙은 삶이다.

     

     

     

     

    여러분에게 십자가란 무엇인가? 고난, 고통, 눈물, 이런 것도 있을 거고요.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십자가는 뭔가요?

     

    믿음의 상징? 주님의 능력? 요 몇 년 교회 설교에서 들어보지 못한 것? 10년 만에 다시금 생각하는 단어? 십자가에서 하나님 아들이 죽음으로 구원이 이루어졌고, 십자가에서 자신을 못 박아 죽음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거고, 그런 십자가가 없는 기독교는 시체니깐 나에게 십자가는 죽음이다?

     

    또 다른 시각으로 사탄의 각도에서 보면 십자가 사건은 사탄이 큰 실수를 한 사건이다. 어떻게든 예수님을 죽이면 자신이 유리할 줄 알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예수님을 죽였지만, 그 사건으로 인해 많은 영혼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하나님은 사탄도, 인간도 생각할 수 없는 이러한 일들을 하셨다.

     

    또, 기독교적 감정의 근원이다. 십자가란 단어를 듣기만 해도 눈물 펑펑 쏟던 그때로 돌아가기. 문제는 지금도 그러신가요?

     

    (십자가는 T자라는 게 함정!) 십자가는 절대적 순종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보여준 순종. 십자가는 메타포다. 상징이죠. (메타포 = 비유, 은유라는 말이다.)

    여기서 십자가는 메타포. 상징, 은유, 비유가 아니다! 절대 아니다! 십자가가 상징이라면, 기독교에 믿음은 헛것이다. 십자가는 실제고, 역사이어야 하는데, 십자가가 상징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말이 안 되고 틀린 것이다.

     

    근데 여기서 정작 중요한 이야기가 안 나왔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우리가 구원받은 거 아닌가? 십자가의 수모, 고통, 순종, 구원 이런 게 아닌가? 맞다! 다 맞는데 또 중요한 의미를 알아야 한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지금 말하려고 하는 것이 전혀 새로운 이야기, 새로운 해석이 아니다. 근데 새롭게 느껴질 거다. 나도 예전에 고통, 고난, 예수님으로 인한 나의 구원.

    이 개념만 알고 있었다. 근데 십자가에서 예수님만 죽었나? 옆에 강도들도 죽었고, 거꾸로 베드로도 죽었다.

     

    근데 그게 답이 아니고, 십자가에서는 예수님만 죽은 것이 아니고, 나도 죽었다. 나! 나! 내가 같이 죽은 것이다. 저는 지금 살아있는데요?

    이렇게 질문을 할 수도 있다. 근데 여기서 말하는 것은 나의 옛사람이다. 옛사람!

     

    그럼 성경에 내가 죽었다는 표현이 있는가!? 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봐라! 내 얘기가 아니다. 이것이 복음의 진수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

     

    지금 기독교가 개독교로, 크리스천이 개독인으로 불리는 이유가 이 완전한 십자가 복음이 없다. 완전히 반쪽자리 복음만 생각하고 있다. 예수님만 죽은 거라고 생각한다.

    왜 이게 중요하냐. 내가 함께 죽어야, 내가 주님과 함께 내가 죽어야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주님이 드러나신다. 근데 이건 없고 그냥 교회 가서 만날 예수님만 죽인다. 더 쉽게 예를 들어 이야기하면.

     

    성찬식, 사순절 때 부활절 오기 전까지 교회서 우리가 뭐하는가. 교회마다 다르겠지만 고난주간 특별 새벽기도, 특새! 또, 다른 큰 교회에는 고난주간에 일단 기도의 용사를 뽑는다.

    그리고 24시간 릴레이 기도를 한다. 항상 지하에 있는 기도실에서 촛불 2개 정도 켜놓고 기도하러 가시고, 설교 때도 그렇고 고난주간에 예수님의 죽음을 애도? 아무튼 예수님 십자가 고난을 생각을 한다.

    또 금식 기도하고,, 미디어 금식하고 일 년에 한 번 고난주간에 금식을 우리는 경험한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다 좋다. 그런데 고난주간에 자기 자신이 주님의 고통,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잘못됐다고, 그 행위에 대해서 나쁘다고 이야기하고 싶은 건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예수님의 죽음에만 꽂혀있으면 안 된다. 복음이 완성되려면, 예수님의 죽음만이 아니라 나의 죽음! 나도 같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복음. 이것이 있어야 한다.

    너무 한국교회는 십자가 예수님의 고난만 생각하고 나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라고만 교육을 받고 거기에만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설교 때 세상에서 가장 아프게 힘들게 돌아가신 분은 예수님이라고 설명도 한다. 하지만 전쟁 다큐, 고문 다큐를 보면 더 힘들고 더 잔인한 고문, 죽음 당한 사람도 있다.

    예수님의 고통을 격하시킬려는게 아니고, 그렇게 고통으로만 포커스를 맞추면 안 된다. 고통 때문에 아까 말한 나의 죽음이 묻히는 게 아닌가 싶은 것이다. 또다시 예를 들면,

     

    사실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녔는데 십자가 이야기했을 때, 예수님 고통, 죽음, 나를 위한 희생 이것만 배웠고 이것만 기억난다.

    그리고 고난주간 때 예수님 돌아가신 영상, 예수님 고통 이야기하면 울고 그런 기억뿐이다. 그리고 한주 지나고 계란만 보면 또 웃는다. 왜 부활하신 예수님을 찬양합시다~ 할렐루야. 계란주고 먹고 다 까먹는다.. 계란 때문에 싸우고...

     

    아니면 반쪽짜리 십자가라고 대부분 이렇게 이야기한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고난 + 예수님의 부활 = 100프로 복음으로 프레임을 걸어버린다. 고난반 부활반.

    이렇게만 이야기하고 이런 프레임에 십자가에 대한 설교를 들었다. 내가 같이 죽었다는 것은 이야기도 없다. 범주 자체에 들어가지 않고 있다. 그러니깐 십자가에서 내가 죽은 이야기를 모르시는 건지 안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 시간 알기 원한다.

     

    그러니깐 이 반쪽짜리 십자가만 있으니깐, 무슨 일이 벌어지냐면, 또 쉽게 예를 들면, 주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 나를 위해 죽어주신 것이다.

    그러니깐 교회는 항상 나에게 영적인 서비스를 해주는 곳이고, 주일날 오면 주님이 나를 위해 죽어주셨네, 밖에 나가서 잘 살고 엉덩이 두들겨 주고, 어깨 주물러주고, 또 밖에서 일하다가 주일날 탕자처럼 오면,

    또 주님~ 어쩌고 저쩌고 하소연하고, 그럼 주님이 아이고 그랬어? 내가 너를 위해 죽어줬잖아, 또 엉덩이 두들겨주고, 또 나가서 살고, 이 정도 수준으로 생각하고 그칠 수 있다.

     

    사실 나도 그렇게 살았다. 그리고 나는 그런 줄 알았다. 이 사실에 대해서 이의제기를 한 적이 없었고, 주님이 날 위해서 죽었다. 이거 하나만으로도 은혜고, 살아갈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 이것도 맞다. 이것이 잘못됐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 만났을 때 펑펑 울고 했던 기억도 있다. 이것을 나쁘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이 단계를 거쳐 가야 한다. 인격적으로 만나고, 내가 죄인임을 고백해야 한다. 이 단계가 필요하다.

     

    그리고 아까 서두에 말했던 그 반쪽, 예수님뿐만 아니라. 바울이 말했던 것처럼 나도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알아야 한다. 자 이제 문제를 인지했다. 이제 결과를 도출하자.

     

    그럼 내가 어떻게 십자가에서 죽어야 되는가. 어떻게 죽는 건지 방법을 알아야 될 거 아니가. 그냥 의식적으로, 생각으로만 그칠 수 있다. ex) 필리핀에는 십자가 코스프레가 있다. 필리핀처럼 행위로써 십자가에서 죽어야 되는 건가? 아니다.

     

    우리는 옛사람이 죽어야 한다. 나의 옛사람. 옛사람이 뭐냐. 나의 죄 된 본성 안에 있는 자아다. 불교는 어떻게 하는가.

    불교는 자아를 멸하다. 자아를 없애려고 수행을 한다. 해암 스님은 약 28년 동안 땅에서 누워서 안 자고, 앉아서 자는 도를 닦았다.

    그렇게 도를 닦는다고 내 자아가 죽을까? 죄 된 본성 안에 있는 자아가 죽을까? 절대 안 죽는다. 강도가 줄어들 수는 있어도 자아라는 것은 멸해지고 없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신앙에 자아를 다루는 방식, 십자가는 자아를 멸하는 것이 아니고 자아를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방식이다. 내 생각을 다 없애버리고, 내 자아를 없애는 게 아니고, 내 자아를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운전하다가 누가 끼어든다. 이때 욕이 나오지만, 순간 확 올라오지만 이때 내가 십자가 복음이 떠오르는 거지. 내가 이러면 되냐. 죽이자, 컨트롤하자.

    이때 주님이 어디 계시냐? 내 안에 계신다. 더 정확하게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

     

    내가 참는 것도, 아니면 내가 절제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내 인격대로 내 성질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 인격대로 살아가려는 그 순종의 방식.

     

    또 예를 들면, 내가 걱정이 심하고, 염려가 많고, 뭐 먹고살지, 내가 이과를 갈까 문과를 갈까? 대학교는 어디가 좋지? 내 성적은 이게 뭐지, 오늘은 뭐 먹지? 간장 반 후라이드 반? 나의 미래 배우자는 어떻게 생겼지?

    부모님 건강은 괜찮으려나? 수많은 생각, 염려할 때, 주님은 염려하지 마~ 내가 너의 주인이고 왕이야 염려하지 마 라고 이야기하신다. 그때 네, 알겠습니다. 염려하지 않고 순종하는 것 이것도 십자가다. 이런 방식.

     

    한 번에 해서 뿅 하면 얼마나 좋을까? 예를 들어서 일주일에 한 번씩 죽고, 주일에 한번 선데이에 한 번만 죽으면 얼마나 좋아.

    1주일 한번 죽고 약발이 오래가고, 또 우리가 수련회 가면 약발이 3일 정도 가잖아, 아무튼 매일, 매 순간 죽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 위대한 바울 선배님이 뭐라고 했어. <내가 날마다 죽노라.>

    날마다 내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내가 2000년 전에 예수님이 못 박히신 시절로 돌아가서 주님과 함께 내 자아가 죽고, 이미 죽은 것이고, 내 안에 그리스도를 순종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핵심이다.

     

    그럼 나는 어떤 식으로 날마다 죽는가? 당신은 어떻게 죽는가? 잘 안되지만, 사례를 이야기하면 좀 더 이해하고 와 닿지 않을까 생각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저는 중고등학교 때 욕을 엄청 찰 지게 잘했다. 그리고 성질도 급해서 확확 내뱉고 상처 주고, 운전할 때 화나면 욕하고, 빠큐 하고 했는데, 군대 다녀오고 계속적으로 교회에서 훈련받고 예수님을 알아가면서 내가 크리스천이 맞는가.

    모태신앙인데 진짜 못됐다. 바꾸려고 노력하고 그중에 입장 바꿔 생각하자! 는 방법으로 화를 덜 내고, 운전할 때는 촉박하게 가지 말고 느긋하게 여유롭게 운전하고 마음을 갖자는 방식으로 화도 덜 내고 이렇게 자아를 다듬어 가고 있다.

    순종하고 있다. 이것은 내가 십자가의 못 박는, 나도 십자가의 죽는 것이다. 여러분들도 한번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욕 안 하는 거 이게 뭐라고 웃기죠? 다른 사람들은 다 안 하는 건데, 근데 이런 방식이 사소하지만 이런 방식이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다. 이런 사소한 것을 바꾸면서 성화가 되고 주님을 더 닮아 가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자체 존재가 뭘까? 엄청 대단하고, 거룩한 존재가 아니고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어도 또 배가 고파지고, 그게 인간이다.

    영적인 것도, 삶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이 땅에 있는 한 아무것도 보잘것없는 존재다. 그것을 인정하고 또 내가 날마다 주님을 내 삶에 모셔야 한다.

    근데 막연하게 내가 만날 주님만 생각하는 게 가능할까? 불가능하다. 내가 뭔가를 선택해야 하고, 내 감정이 일어나고, 생각이 일어날 때, 내 뜻을 내려놓고 내가 해온 습관이나 버릇을 내려놓고, 포기하고 주님의 뜻, 생각을 향해 가는 것. 이것이 십자가다.

     

    아직도 어렵지? 왜 어렵냐. 이런 이야기가 처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이야기하는 자아는 죄성 된 자아를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측은지심 같은 것을 죽일 필요가 없다. 남을 측은하게 여기고, 도와줘야겠다는 마음은 예수님 마음이다. 그런 걸 죽이라는 게 아니고, 죄 된 자아를 죽이는 것이다.

     

    근데 내가 어떤 죄성을, 죄 된 본성을 가지고 있는지 자기가 더 잘 안다. 본인 문제는 본인이 더 잘 안다. 사람마다 다 다르고, 본인의 유혹의 약한 거, 본인의 욕심, 성질, 버릇, 자기가 잘 아니깐 그 죄 된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작업을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냥 철학적인 사유, 생각만 하고, 알기만 하고 끝이 아니라, 신앙은 그런 게 아니다 신앙은 삶이다. 내 삶에서 주님 때문에 바뀌고 변화되는 게 있어야 하고 그게 상급이 된다. 주님이 나의 상급.

     

    우리가 너무 거창하게 생각해서 예수의 향기를 내는 삶, 열방을 향한 삶, 대단한 거만 생각한다. 그것도 중요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너무 거창하다.

    예수가 내 안에 산다. 이것도 너무 막연하다. 아까 말했듯 작은 거, 사소한 것부터 바꾸는 것이 날마다 죽는 것에 첫걸음이다.

     

    막 민족과 열방을 위해서 이야기하고, 체인지 더 월드 이런 것만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것도 필요하다. 나쁘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만 이야기하는 사람은 자기 변하기 싫어서 그럴 수도 있다.

    왜냐! 자기 변하는 게 가장 어렵다. 제일 어렵다 힘들다. 하지만 우리에 신앙, 십자가는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하고 싶은데,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알기에 내가 하지 않는 것.

     

    그리고 우리나라는 행위를 강조 안 한다. 믿음을 강조하고, 이 작은, 사소한 행위에 대해 그렇게 많이 말씀을 안 한다. 거창한 거만 설교시간에 이야기하고, 선교에 대한 거, 큰 거, 멋진 거를 이야기한다. 근데 이게 멋있어 보인다. 뭔가 크고 슬로건을 걸어야 멋있다.

     

    예를 들어 아까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여러분 체인지 더 월드! 세상을 바꿉시다! 멋있잖아. 근데 너 바꿔!, 청소기 돌려, 와이프로 변기 뚜껑 올리고 내리고 때문에 싸우면 내려줘, 치약 가운데부터 짜지 마, 이런 사소한 것을 슬로건으로 내면 웃기잖아. 근데 이것부터 해야 하고 이것이 기본이다.

     

    결국 십자가는 자기를 돌아보는 것이고, 자기와 주님과의 관계를 연결하는 것이다. 내가 십자가에 맞게 살고 있는가? 그런데 그런 삶이 우리에게 없다.

    만날 복만 빌고, 내 잘되게, 어디 대학 가게 해주세요, 성령의 능력만 구하고, 그러나 진정한 믿음과 신앙은 십자가부터, 내가 죽는 것부터 시작이다. 이렇게 해야 개독교가 기독교로 변한다. 십자가를 통해서.

     

    내가 죽고 주님이 사신다고 하는데, 어떻게 사는가? 느껴지나? 뭔가 감성적이고, 성품이 주님을 잘 느끼는 분들이 있긴 하지, 근데 여기서 우리는 주님을 내 안에서 느끼려고만 하는데, 하나님은 느끼시는 분이야?

    아니야 하나님은 영이시다. 보여 안 보여. 안 보인다. 잡신은 보일 수 있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보이시 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는 분이다. 하나님을 잡신으로 생각하지 마라. 어떻게? 믿는 거다. 하나님은 믿는 분이다. 내 안에 계시는 것을 믿는 것이다.

     

    특히 찬양 사역하는 분들을 예로 들면, 찬양 인도할 때, 뭔가 느낌이 있고, 부르부르 떨려야 하고, 찬양 빨이 안서네? 오늘 별로 안 좋네? 이런 거 필요 없다고 느낄 필요 없다고.

    느끼는 것은 잡신, 무당이나 느끼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존재하는 방식은 믿음이다. 우리의 믿음. 그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뭔가 나의 오감으로 느껴지면 그럼 믿음이 필요 없지, 느껴지니깐 믿을 필요가 없어지지. 느껴지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마라.

     

    십자가가 어찌 보면 이것도 고행이다. 내 자아를 자꾸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아야 되니깐.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에게도 고난이고, 예수님만의 고난이 아니고 우리에게도 고행, 수고와 노력이다.

    또 한편으로 십자가의 고난만 있으면 부담스럽다. 십자가에는 우리의 고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리고 우리의 능력이 된다. 왜냐하면 내가 바뀌는 것이 능력을 주셨기 때문이고, 그냥 바뀌는 것이 아니니깐.

     

    십자가의 능력이 옛날에, 드라큘라 오면 십자가 보여주면 드라큘라 놀라고 없어지고 그런 능력이 아닌 거 알지? 십자가가 능력이라는 것은 나를 변화시키는 힘.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십자가란 말이지.

     

    수많은 영화 대사, 믿는 사람이든 아니든 사람은 잘 안 변해 라고 많이들 이야기하는데 예를 들면 옛날 지존파 사건, 지존파 사형 전에 예수 믿은 거, 왜 그런 말이 나오나, 사람이 쉽게, 진짜 안 바뀌니깐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 인간이 바뀌고 변화되는 것이 십자가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 더, 이 안에 얼마나 큰 기쁨이 있을까? 내가 주님을 통해, 십자가를 통해 바뀌고 변화됐을 때 기쁨. 더 나아가 부모님이 나의 바뀐 모습을 볼 때 부모님이 얼마나 기쁘시겠냐?

    더 나아가 나를 만드시고 창조하신 주님이 나를 봤을 때 얼마나 기뻐하실까. 그래서 십자가는 능력이면서 기쁨이다.

     

    마지막으로 소설을 써보자. 이 시대에 사단은 우리를 교회 못 나가게 하거나 예수 못 믿게 하지 않는다. 나가라고 하고, 교회 열심히 다니고, 봉사 열심히 하고, 출석 열심히, 예수 열심히 믿게 하지만,

    진짜 이 복음, 십자가의 복음은 알지 못하게, 반쪽만 알게 하는 게, 그냥 반쪽만으로 그치게 하는 것이 지금 사단의 전략이 아닐까 생각이 된다.

     

    십자가는 우리의 고난뿐만 아니라, 우리의 능력이고 기쁨이고, 자유함이고, 영광이다. 단순히 십자가는 영광이다.

    밑도 끝도 없이 영혼 없이 붙이지 마시고 주님과 함께할 영광이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나도 내일 아침에 죽어야 합니다. 마지막 요약하고 마칩니다.

     

    첫 번째. 십자가 예수님도 죽었지만 나도 같이 달려 죽었다.
    두 번째. 그리고 내가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예수님이 내 안에 다시 사셨다.
    그래서 결국 그 십자가는 우리의 고난뿐만 아니라 우리의 능력이 된다.

     

    아는 거랑 들은 거랑 그걸 실천하는 거랑 천지 차이다. 다들 신발 신고 움직이십시오.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