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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수천당 불신지옥 (믿음과 구원)
    Bible 2020. 5. 22. 19:19

     

    예수천당 불신지옥

     

    (믿음과 구원)

     

     

     

    “예수천당 불신지옥”
    이것은 복음인가? 이것은 복음인 듯 복음 아닌 복음 같은 거? 틀린 말은 아닌데, 맞는 말도 아니고, 이 말만 가지고 들이대기에는 위험성이 있다.

    a~z까지 다 이야기해야 하는데 예수천당 불신지옥은 그중에 알파벳 하나다.

     

    교회 트레이드마크인 이 질문. 지금 죽으면 천국가실수 있습니까? 구원의 확신이 있으십니까? 지금은 죽으면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내일은 모르겠다. 한 치 앞도 모르는 인간이니.

    지금은 갈 것 같지만 내일은 모르겠다. 가고 싶어요. 내가 그러면 무조건 확신한다고 가는 거야? 제 멋대로 살다가 자기가 확신만 한다면 가는 것인가?

     

    내가 확신하면 가는가? 구원파랑 다르지 않다? 구원파는 이미 구원에 대한 문제는 해결됐고, 이미 영화, 인치심을 받았다고 구원에 대한 도장을 찍고, 구원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상태가 된다.

    그래서 구원파는 구원은 이미 끝났으니 지금 살면서 자기 마음대로 살고, 남에게 피해가 되든 안되든 자기가 구원받았다고 하는 구원파랑 뭐가 다른가.

     

    아니 예수를 안 믿고서는 어떻게 저런 행동이 나오지? 구원은 받아서 천국 가는 것은 이미 끝났기에, 이 땅에서 좀 부유하게 살고 좀 풍요롭게 살기 위해 이렇게 발버둥 치는가? 이게 믿음인가? 이게 맞는가?

     

    대부분 우리는 구원에 대해서 염려하지 않는다. 이미 구원의 확신은 이미 깔고 들어가야 하는 게 한국교회에 신앙이었다.

    구원의 확신이라는 내용이 성경에 있나? 성경에 구원에 확신이라는 단어는 없지만 사도바울이 로마서에서 생명이나 천사나 장래일이나 이야기하면서 그리스도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고 이야기한다.

     

    근데 여기서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것은, 내가 하는 게 아니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끊을 수 없는 것이잖아. 근데 구원의 확신은 예수님이 느끼는 거야? 아니 내가 느끼는 거잖아. 도대체 뭐야? 어려운 문제다.

     

    과하면 구원파가 되는 것이고 부족하면 믿음이 없는 거고. 참 쉬운 문제가 아니다. 이 문제는 여기서 이야기했고 예전부터 이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가 많았다.

     

    자 그래서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믿기만 하면 구원 얻는다는 이 싸구려 이 싸구려 복음. 장기하에 싸구려 커피보다 더 싸구려인 이 싸구려 복음만 알고 있다.

    싸구려 커피는 돈 내고 먹지만, 우리는 휴지 주고, 커피 타 주고, 전도용품 주면서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한다.

     

    한국의 교회에 구원관이 구원파와 다를 게 없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잘못된 게 아니고 맞는 건데 그 믿음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그것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믿기만 하면 천국 간다는 것에 대해 초점이 맞춰져 있고, 또 알고만 있는 것에 대한 부작용을 오늘 알아보자.

     

    전도할 때 예수 믿고 구원받아야 해!라고 이야기하면 지금 맘대로 살다가 죽기 전에 믿을게!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가 아 네가 언제 죽을지 모르니 지금 믿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데, 그냥 믿기만 하면 구원 얻는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이 그래서 나온 거 아닙니까?

    그 사람들이 공공장소에서 어떻게 피해를 끼치는가는 생각하지 않고, 그 한 영혼 한 생명 영혼구원을 위한 그 마음은 알겠는데, 얼마나 귀하게 여기면 그렇게 하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것이 자기 의 일 수도 있고, 이왕이면 좋게 해석해서 한 영혼을 정말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친다. 믿기만 하면 천국 간다.라는 예를 좀 더 들어보자.

    네이버에 교회 오빠만 치면 뭐가 많이 나오는데 전부 부정적인 말입니다. 이런 상담내용을 뒤져보니, 한 여대생이 있는데 그 여대생은 교회 안 다니는데, 아는 남자가 교회를 다니고 교회에서 찬양팀 리더도 하고 학교에서 여자도 후리고 다니고 해서 너 왜 이러냐고 물어보니, 자기는 하나님이 모든 죄를 용서하신다고 생각하고 행동했다.

    과거에 지은 죄, 지금 지은 죄, 미래에 지은 죄를 다 싹 깨끗하게 해 준 예수님을 믿으니 난 상관없다.라고 이야기하고 사실 그 남자는 제 남자 친구입니다라고 하는
    상담내용을 봤다.

     

    근데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다. 방금은 약간 극단적인 케이스를 예로 들었고, 다양한 케이스들이 있다.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으니, 아까 그 남자처럼 남에게 피해 주고 막 살지는 않지만 자기만을 위해 사는 사람.

    그냥 내 성공, 내가 바라는 것, 이웃사랑은 없는 나만 사는 것. 이렇게 이기적이게 사는 케이스도 있다.

     

    몇 년 전에 아버지가 생활고에 힘들어서, 자기 아이들을 한강에 던졌다. 왜 죽었냐고 물어보니, 나 예수 믿는다.

    자살하면 지옥 가니 애들은 내가 죽이고 나는 회개하면 된다.라고 이야기했던 기사도 있었다. 지금의 가르침대로라면 이런 논리도 이해가 된다. 왜? 회개하면 되니깐.

     

    실제로 감옥에서 죄수들이 다양한 종교를 믿고 사회로 다시 나올 때 가장 재범률이 많은 종교가 기독교였다. 우리 기독교 안에 가르침 중에 죄를 지으면 회개하면 된다는 그런 교리가 있으니 재 범죄율이 높다.

     

    지금의 가르침으로는 이런 행동이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이 된다. 이해가 안 되지만 어떤 죄도 회개하면 용서받으니 교리적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네?

     

    이것을 바로 잡아야 하지 않겠나? 이거는 심각한 문제다. 진짜 아까 말했듯이 환자다. 믿으면 천국 간다. 회개하면 용서받는다는 싸구려 복음 때문에 우리 한국교회가 욕먹고 개독교로 욕먹고 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될까? 어떻게 믿어야 구원받을까?

     

    나보고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간다가 한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우리는 예수님 영접하고 나고 예수를 믿고 나면, 뭔가 목적 달성, 전도했다. 라 생각하고 목적 달성했다고 생각하고 끝나버리게 된다.

    다시 말해 예수 믿으면 끝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끝이 아니라 믿음의 한걸음. 첫 여정이다. 예수를 영접하고 믿었다는 것은 이제 시작인 것이다.

    실은 구원의 확신이 없어도 문제다. 내가 뭐 잘하면 구원받을 것 같고, 내가 못하면 못 갈 것 같고 이런 생각 자체도 문제다.

    로마서 10장 10절에 보면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 우리는 입으로 시인해서 구원에 이른다고 했다. 보통 입으로 시인해서 구원에 이른다고 한다.

    우리 보통 영접기도 하잖아요. 근데 그것은 끝이 아니고 시작이다. 영접기도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근데 이것을 신앙의 완성점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예를 들면 호스피스 환자들, 삶의 끝자리에서 주를 고백하고 죽으면 해당되지, 예수님 옆에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처럼, 이런 분들은 해당되는데.

    교회 오래 다니고, 장로와 목사로써 살아가고 40-50년 신앙생활 한 사람이 단지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 그리고 전혀 삶의 열매가 없는 그냥 믿어 라고 구원을 받는 다고 하면 이게 얼마나 넌센스냐.

    믿는데 어떻게 열매가 없지? 제대로 안 믿는 건가? 그러니깐 그건 믿음이라고 볼 수 없지 않을까. 그럼 행위 구원자인가? 행동으로 구원받는가?

     

    우리는 아까 말했던 로마서 10장 10절에 뒷부분 입으로 시인해서 이것만 강조하고 있다. 앞부분도 봐주자. 우리가 마음으로 믿어. 진정으로 마음으로 믿고 시인해야 한다.

     

    예수를 진정으로 믿으면 안 변할 수 없다. 조금이라도 변하는 게 있다. 예수를 믿고 나서 뭔가 욕심이나, 내 생각들이 조금은 줄어들거나 바뀌고 있을 것이다.

    이게 왜 바뀐 건가. 주님이 나의 주인이고 나의 왕이시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하고 싶은데 주님을 생각하면 좀 참아야지, 이렇게 되는 것이다. 조금의 변화의 포인트가 있다. 안 믿었으면 변화가 없다.

     

    그럼 이렇게도 볼 수 있다. 방향이다. 아까 교회 오빠는 예수님을 믿었는데, 자기가 가는 자기 방향으로 계속 가고 있는 거고, 그런데 예수님 제대로 믿은 사람은 돌아서는 것.

    그게 빠른 걸음이 됐든 기어가든 어쨌든 돌아서서 주님 믿음의 대한 방향으로 가는 것과 차라리 예수님을 등에 엎고 자기가 자기 방향으로 바꿀 마음이 없는 것 이런 차이로 볼 수 있다.

     

    회개는 가는 길을 돌아가는 것인데, 우리는 죄를 짓고 회개했기에 죄책감이 없이, 죄책감도 버리고 그냥 더 추진체를 달고 더 죄를 짓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여기서 회심과 회개를 구분지어야 한다. 회심은 일생에 한 번만 있는 것이다. 회심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돌아서는 것이고, 그 이후에 예수님을 믿고도 짓는 죄를 그때마다 하는 것이 회개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게 되면 은혜가 온다. 그러면 세상이 달라 보이고, 노력하지 않아도 변하는 것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자기 노력이 들어가야 한다.

    또 자기 노력을 하게 되면 자기 의가 드러나고, 누구는 저 정도만 하고 나는 이것도 하니깐 내가 더 많아 보이고 더 신앙이 좋아 보이는 나의 의가 될 수도 있다.

    근데 나의 의인지 아닌지 구분하는 방법은, 남을 정죄하는가 아닌가 잘 봐야 한다.

     

    올바른 믿음이란 무엇인가? 자가진단을 해보자. 내가 잘 믿고 있는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믿는 자들의 삶이 열매로 이어져야 한다.

     

    믿음은 의심으로부터 시작된다. 의심부터 해야지 만남이 있다. 무조건 믿으라 무조건 세뇌당해서 이러한 폐단이 생기고 사단이 난 거 아닌가. 그리고 이런 말이 있다 건강한 믿음은 의심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른다. 구원이라는 것이 확신으로만 끝나는 것으로만 알고 있다. 우리도 이단처럼 자기에게 이로운 쪽으로 말씀을 똑 떼다가 적용한다.

    짝 복음이라니 어머니 하나님이라니, 예를 들면 내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이것은 하나님이 욥에게 한 것이 아니라 친구들이 한 것이었다.

    아전인수격으로 말씀을 적용하지 말자. 부적이 아니다. 물론 말씀에는 능력이 있지만 주문처럼 요절주의 하지말자는 것이다.

    말씀만 읽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안에 복음을 알아야 한다. 반야심경처럼 막 외우고 그것 요절만 외우는 요절주의는 안된다. 뭐든 ~주의는 안 좋다.

     

    다시 올바른 믿음이란, 내 주인이라는 것을 믿는 거. 내 주여 주여 라고 하는 주님으로 주인으로 왕으로 믿는 거 주인과 왕으로 믿는다는 것.

    근데 우리는 이렇게 안 배웠고, 내 왕으로 믿는 게 아니라 어렸을 때 내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사건의 주인공, 예수님이 제물이 되어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분. 이 분을 믿는 것 아닌가? 그럼 여기서 나는 믿는다 하면 천국 가고, 아니면 지옥 가는 것. 이렇게 배웠고 믿어왔다. 십자가 사건만 믿었다.

     

    여기서 이 반쪽만 아는 게 아니라, 예수님이 나의 주인과 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전에 주인이나 왕이라는 단어가 빠진 것은 아니었다. 강조가 안되었고, 정확한 의미를 우리가 몰랐던 것이었다.

     

    이렇게 해야 한다. 예수님이 너의 모든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고, 그 십자가 사건을 믿고, 또한 그 예수님을 나의 왕 나의 주인임을 인정하고 살겠냐고 영접할 때 이야기해야 한다. 이문제가 우리의 현실이다. 그 믿음이 대속해서 죽은 거만 믿느냐? 나의 주인임을 믿느냐.

     

    그래서 바울이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라고 말하는데 우리는 이 말을 모른다. 이미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니깐.

    어찌 보면 우리는 바울보다 믿음이 좋아 보인다. 구원의 확신이 있어요? 물어보는 것보다 하나님의 자녀의 대한 확신이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노예임을 확신하나요? 구원의 확신은 다 믿는데, 그거 말고 종의 확신 있는가? 구원의 확신을 물어보면서, 종의 확신을 좀 물어봐라.

    하나는 잘 해결했다. 그 다음은 말하지 않거나 무시해버린다. 왜 도망가고 싫어하니깐. 근데 2개가 있어야 완성이 된다.

     

    정말 내가 믿는 사람인가. 구원의 이르는 믿음이 있는가. 믿음의 합당한 열매가 있는가. 진짜 자기 자신을 돌아보자. 나부터.

     

    진짜 결론적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 네가 구원을 받았다 말았다. 이것은 우리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주님만 아신다.

    마태복음 5.6.7장 산상수훈에 대상이 누굴까요? 누구에게 줬는가? 주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12제자 포함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 모두.

    그 모두에게 지금으로 표현하면 크리스천들에게 얘기하는 거다. 마지막 7장에 14절부터 에피소드가 나오면서, 좁은 길로 가라. 넓은 길도 있고 좁은 길도 있는데 웬만하면 좁은 길로 가라 라고 말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옵션이 아니고 무조건 좁은 길로 가야 되고 큰길은 멸망의 길이라고 명시되어있다.

    그리고 그다음이 열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지금 시대 선지자 역할은 누군가. 지금 시대에는 목사님. 귀신 쫓아내고, 능력도 행하고.

    근데 주님이 뭐라 하는가. 도무지 모르겠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지막 반석. 산상수훈의 결론이 반석이다.

    반석이 뭐야?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가 높아지지 않고 자기가 높아지고, 그럴 때 예수님은 몰라 너 몰라. 그리스도라는 좁은 문으로 가고 있는가. 이게 결론이다.

     

    좁은 길이 무조건 힘든 길이 아니다. 문자적인 좁은 길 좁은 게 아니고, 어떤 이에게는 행복한 길인데 남들이 보기엔 쟤는 좁은 길 간다고, 남들이 보기에는 좁은 길이라고 보일 수 있지만.

    그 안에 행복이 있고 가치가 있고, 그리고 좁은 길을 가는 사람이 자기가 좁은 길로 가는지도 모를 수도 있다. 그 안에 기쁨 행복이 있으니. 너무 걱정 안 해도 된다.

     

    신앙이 있다는 사람이 왜 이렇게 하지? 어떻게 믿음을 가지고 믿는다라고 하는데 어떻게 왜 저렇게 행동하지? 어떻게 칼빵을 하지? 성추행을 하지? 그러면 저 목사님이랑 나랑 같이 천국에 가나? 이런 생각하면 멘붕에 빠진다.

     

    그럼 과연 이게 뭘까? 누구든, 선한 마음으로 시작했다가 점점 세상의 부유함이 밀려오고, 조금씩 조금씩 내 안을 스며들게 만들었다. 처음부터 작정하고 하는 사람은 없다. 환경이 변하면 조금씩 변한다.

     

    어떤 종교든 베풂보다 챙기는 게 더 많으면 그것은 100% 사이비다. 정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배한다면, 양심의 찔림이 없을까?

    근데 그 찔림. 양심을 무시하고, 나중에는 그 찔림이 안 들리고 나중에는 더욱 멀어지고 나중에는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나도 너희도.

     

    아무튼 주님을 선택할 것인가, 나를 선택할 것인가 그 선택해야 할 타이밍 때 내가 죽고 주로 살아보자. 항상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자. 정신없이, 생각 없이 곧이곧대로 믿지 말고.

     

    마지막으로 질문, 우리들에게 신앙이란, 기나긴 터널의 입구, 시작이며, 새로운 삶의 첫걸음. 믿음으로 끝이 나는 게 아니라 시작이다.

     

    우리 모두 구원의 확신은 다 있다. 이미 다 있다. 교회 좀 다녔다 하면 다 있는데, 그것 말고 왕이신 주님의 대한 확신이 있는가 주님의 종이 되는 확신이 있는가?

     

    그럼 지금 여러분에게 왕은 누구인가? 돈? 물질? 명예? 이성친구? 부모님? 아님 공부? 아님 친구와의 우정? 아니면 또 다른 무언가? 저번 주에 말했던, 반쪽짜리 십자가랑 일맥상통하는 것이랑 같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것만으로 끝나고, 예수님이 내 안에 구원자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내가 그리스도와 같이 죽고, 내가 내 인생에 주인.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왕이 되고 주인이 되는 것. 우리가 마지막 심판대에 섰을 때, 성경에 그리스도의 심판대라고 하는데, 그때 기준이 우리가 정말로 그리스도를 위해 살았나 안 살았나로 결정이 된다.

    근데 지금 교회에서는 복, 구원 이런 거만 이야기하고, 심판대는 이야기 안 한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을 믿느냐? 믿으면 천국 가고, 구원의 확신이 있는가만 이야기한다. 왜 반쪽만 이야기하는가!

    성경에 심판대가 나오는데, 백보좌 심판, 그리스도의 심판이 계속 나오는데 왜 이야기를 안 하는가. 왜 왜. 안 가르쳐줘서 사람들이 다 죽어간다.

    근데 왜 안 가르쳐주나 심판은,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선다. 교회는 왜 심판에 대해 이야기 안 하고, 죄가 뭐고, 뭐가 죄인지 말해야 하고, 구원이 단순히 믿음, 심증적인 믿음만으로 만 가는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도 알아야 한다. 영혼이 죽어가고,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어떻게 책망받을지 모르는데. 내 안에 주인이 누구인가. 내 안에 왕은 누구인가. 나 자신이 주인인가? 나의 주인이 누구인가 점검합시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있는가 생각해 봅시다.

     

    마지막으로 성경 이야기를 하고 마치겠습니다. 내가 지금 생각하는 주인은 뭔가 생각했을 때, 돈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돈. 맘몬, 예수님도 이렇게 이야기했다.

    두 주인을 섬기지 마라고 했다. 유일하게 물질에 대해 주인이라고 우상숭배라고 한 것은 돈 밖에 없었다. 우상숭배는 다른 신에게 하는 것인데 돈은 신이 아니고 물질인데, 돈을 두 주인, 섬기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돈이냐, 하나님이냐. 내가 생각하는 나의 주인은 돈인가를 생각했을 때.

     

    성경에 예수님이 부자 청년에게 니 재산을 다 팔고 나를 따르라 했을 때 여러분들은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저는 옛날에 이런 생각이 들었지요, 저 바보 같은 부자 청년 내 같으면 그냥 다 팔고 예수님 따르겠다. 이 어리석은 놈 용기 없는 놈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지금은 내가 부자 청년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통장에 얼마 없지만 다 팔고 같이 가자고 예수님이 오면 엄청 근심이 될 것 같다.

    지금 내가 29인데 예수님도 청년이었으니 얼마 차이 안 나는데 내한테 와서 통장 유니세프에 기부하고 내 따라와 라고 하면 오겠냐고, 내 안에도 엄청 많은 세상의 부요함을 따르고 있다.

    내 안에 나도 모르게 예수님이 아닌 다른 것이 나의 주인으로 자리 잡고 있는지 생각해보자. 여러분도 한번 자기 자신을 봤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 수시로 점검하고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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