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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와 자유의지 / 아담과 하와 선악과 생명나무Bible 2020. 5. 27. 13:50
선악과와 자유의지
(선악과 자유의지 아담 하와 생명나무)
서론
기독교를 몰라도 이건 안다. 뭘까요? 선악과!
선악과는 많은 크리스천, 비 크리스천들이 궁금해 하지만 정확하게 답을 모르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야기해 볼 필요가 있다.
혹시 선악과에 대해서 알고 싶었던 거나, 평소에 궁금했던 거, 자유롭게 우리가 상상을 해보았으면 한다. 유대인들이 다윗이라는 조상을 주제로 여러 방면으로 이야기하고 토론했던 것처럼 우리도 선악과라는 주제로 건강한 상상과 생각을 해보았으면 한다.
선악과는 동산 가운데 있으니깐, 정 가운데에 잘 보이는 곳에 심겨 있어서 먹지 말라했지만, 너무 잘 보여서 너무 맛있게 보이고 괜히 하지 말라는 것은 더 하고 싶으니깐 선악과를 먹은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가기도 한다.
이미 먹었는데 뭐 어쩌겠어, 과거는 묻지 마세요. 죄송해요. 그렇게 하나님께 용서하면 안 될까? 생각할 수도 있다. 또 선악과는 어떤 맛일까? 궁금하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선악과가 뭔가 심오한 나무고 설명을 잘 안 해준다. 어떤 맛일까? 왜 만들었는지 물어보면 이야기하기를 꺼려한다.
아무튼 선악과는 하와가 먼저 먹었고, 그리고 아담에게 줬다. 왜 줬을까? 너무 맛있어서 줬을까? 아니면 반대로 너무 맛이 없어서 "너 한번 먹어봐라 줬을까?" ㅎㅎ
근데 처음에 하와가 먹었을 때는 눈이 안 밝아지고, 아담이 먹고 나서 눈이 밝아져 부끄러워졌다. 왜 하와가 먹을 땐 눈이 안 밝아졌지?
원리대로 하면 하와가 먹었으면 밝아져야 하는데 부부는 일심동체라서? 아니면 대표성을 두고? 이야기하신 걸까?
교회 안 다니는 사람도, 심지어 교회 잘 다니는 사람도 궁금해하는 것. 왜 이걸 만들어놔서 왜 죄를 짓게 만들게 하냐고. "하나님이 만드신 저 여자가 먹으라고 해서 먹었다." 아담의 말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또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왜 리셋을 안 해주었나? 예를 들면, 남자는 일을 하고 여자는 해산의 고통을 느끼는데, 한 10년 동안 일하고, 해산하고 하다가 다시
Reset 시켜주셔서 돌아간다면 힘든 걸 아니깐 절대 따먹지 않았을 거다. 왜 따 먹어서 수고하며 살게 만들었는가?
근데 죄를 짓기 전에도 탱자탱자 놀고 일을 안 한건 아니었다. 왜냐면, 아담이 일을 한 것은 이름을 지어주는 일.
에덴동산이라는 국립공원에서 이름을 지어주는 공원 관리직 화이트칼라에서 지금 죄를 짓고 블루칼라로 생산직이 된 것이다. (블루칼라, 화이트칼라를 폄하 X, 이해를 돕기 위한)
공기업 관리직 공무원에서 일용직이 되었다. 그러니깐 일이 없었던 게 아니라 일의 질이 달라진 것이다. 죄짓기 전에는 기쁨 안에서 일을 하였지만, 이제는 일을 안 하면 안 되는, 일을 해야만 먹고살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대로 완전하게 인간을 지었다고 생각이 되는데 왜 먹었을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나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했지만, 완전한 것이 아니라 아담과 하와 당시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죄짓지 않을 수도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럼 나중에 천국에 가면 어떻게 되나?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가 된다.
그러면 애초에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만들 때 천국처럼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로 만들면 되는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냥 짠! 하고 천국처럼 계속 우리를 만들고 그 틀 안에서 세상이 돌아가도록 하는 게 아니라. 자연의 상태에서 새로운 도시, 새로운 문화가 계속 발전하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디자인하셨다.
천국의 형태가 에덴동산으로 시작해서 계속해서 발전해서 새 예루살렘 성으로 도시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처음부터 완성된 계획된 것이 아니라.
예를 들면 게임으로 비유하면, 처음부터 짠 다 만든 게 아니라. 길도 닦고 집도 짓고 점점 발전되게 해 두신 것이다. 그냥 치트키 쓰고 탁! 탁! 탁! 나오는 게 아니다.
그러니깐 하나님이 우리에게 창세부터 지금까지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명령을 주신 것. 그 말씀을 따라서 그렇게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한다.
개발하고 좋은 문화를 발전시켜야 한다. 천국은 완성해 가는 거다. 우리는 지금 그 과정에 있다. 갈수록 끝에 가까워지겠지만.
그래서 결론적으로 제일 궁금한 건. 왜, 만들었는가? 결국 핵심은 이 선악과를 왜 만들었냐? 이것이다. 근데 지금까지 들어왔던 답은, 모른다. 주님만이 아십니다.
왜 이런 걸 물어봐? 하나님이 하신걸 왜 의심해! 이런 소리를 들었고, 아니면 궁금해도 말하지 못하는 상황에 있었던 현실을 지내왔다.
청년시절, 젊을 때 생각할 환경을 만들어주고, 합리적인 의심을 하고, 따져보고 생각을 하게끔 만들어야 하는데 아예 생각을 못하게 막아 버리거나 그냥 두리뭉실 넘어갔던 적이 많이 있었다.
오늘 이 시간 선악과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단 5분이라도 생각하고 나누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여기서 답을 정하고 결론을 내리고 무조건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성경 속 진리 안에서 같이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본론
먼저, 선악과. 성경 원문에는 선악과는 뭐라고 표현되어 있는지 알아보자. 유대인들은 기본적으로 표현할 때 극단적인 2가지를 대조해서 표현함으로 인해서 전체를 표현하는 서술방식이 있었다.
우리랑 좀 다른 방식이다. 이것이 선악과라고 해서 반드시 선과 악을 분별한다기보다는 이렇게 볼 수 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맡겨놓으신 관리자. 대리자.
하나님 통치 안에서 인간은 관리자의 역할을 누릴 수 있었고, 긴 시간 그 역할의 기쁨과 하나님과의 교제를 잘 할 수 있었는데, 그런데 인간이 대리자, 관리자에서 통치자의 역할을 미리 당겨 온 것이다.
결국 뱀에 속아서 주인이 되고자 하는 개념이 있다. 통치자와 재판장의 역할을 인간이 하겠다는 의미이다.
쉽게 다시 한번 설명하면, 성경 원문에는 선악과는 2가지(선과악)를 대조해서 표현함으로 인해서 전체(통치자,재판장,주인)를 표현하는 서술방식이다.
선악을 알게 되면, 재판을 할 수 있다. 여기서 재판을 하려면 선과 악을 알아야 재판을 할 수 있다. 재판을 하고 판단하는 자체가 하나님의 자리에 섰던 것이다.
우리가 선과 악이라고 해서 윤리적인 좋은 짓, 나쁜 짓이 아니라 아까 유대인의 표현 방식처럼 선과 악을 이야기함으로써 전체적인 의미인 재판장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럼 왜! 하나님은 왜! 굳이 선악과를 만들었는가. 한마디로 말해보세요!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약속이다. 피조물과의 약속. 그걸 왜 만들었는가.
왜 그걸 만들어서 죄짓게 만들었나? 왜 피조물을 만들어서 피조물을 힘들게 하는가. 하나님이 갑이야?
자, 방금 언급한 내용들은 우리가 몰라서 하는 말이다.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내 마음대로 살고, 답답해서 담배도 필 수 있고, 더워서 얼음 많이 들어간 시원한 맥주도 마실수 있고, 자매들을 너무 사랑해서 2~3명 양다리 연애도 할 수 있고, 엄마한테 화내고, 신경질 내고, 친구에게 욕하고 뭐 다 할 수 있다. 그럴 수도 있다.
근데 그 대신 너의 그 본능, 너의 그 의지로 나를 순종하고 나를 따라주면 안 되겠니?라고 하나님은 자신을 따라주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피조물인 우리 스스로. 그러니깐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해서 인간들에게 선악과를 준 것이다.
결론은 선악과를 우리에게 주신 이유는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유의지!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었을지 하나님이 알았을까? 몰랐을까? 다 아셨겠지, 하나님은 인간이 따먹을지 알면서도 인간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는 권리와 권한을 주신 거다.
더 쉽게 예를 들면, 여러분이 결혼하고 출산 전에 자녀가 부모 말을 잘 들을 거라고 생각하고 아이를 낳았나요? 아니면 애들이 말을 안들을 거라고 예상하고 출산하셨나요?
와 이 정도일 줄 몰랐네. 내 새끼는 안 그렇겠지? 생각했는데 엄청 속을 썩일 수도 있습니다. 자 이것처럼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을 거를 알았지만(허용적 작정) 부모가 애를 낳으면 이 자녀가 나를 속 썩일 거라 알고는 있지만 출산하신 것처럼, 하나님도 우리를 알고 계신 것이다.
또 우리가 자녀를 출산하는 이유는 뭡니까? 그건 바로 사랑의 결실이 아이들이기에 자녀를 낳고 그 자녀들이 분명 속을 뒤집고 때론 기쁨이 될 때도 있지만 다 예상하지만,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기에 낳았습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또 예를 들어 두 아들을 가진 엄마가 오늘은 형이랑 동생이랑 좀 조용하네? 근데 내일 되거나, 조금만 있으면 둘이 싸우고 난리 피울 수 있다는 확률이 높다는 것을 엄마는 알고 있습니다.
근데 내일이 되었고, 모레가 되었는데도 두 형제가 서로 아끼며 잘 놀고 있는 모습을 볼 때 그 엄마의 마음은 얼마나 기쁘고 대견스러울까요? 그때 그 마음. 그 엄마 마을 잘 듣는 그때 기쁨. 아이들의 자유의지로 엄마를 기쁘게 할 때. 얼마나 엄마가 뿌듯할까요?
우리도 그 자유의지로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순종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늘 우리에게 그 선택권이 있습니다. 순종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그 순종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서 죄를 짓는 것보다 순종하는 삶을 선택하는 것.
내가 선택, 내가 내 의지로 순종하는 것, 그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자유의지에 결론은 자발적 순종에 있습니다.
결국 선악과의 의미는 자유의지에 대한 순종의 상징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피조물임을 인정하자. 선악과, 그 열매의 효능, 무슨 열매였는지, 어떤 나무였는지 그런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준 것이고, 아담, 하와를 로봇으로 만든 게 아닌 자유의지를 준 상징이 선악과였다.
예를 하나만 더 들어보자. 미국에서 새로운 약이 개발되었는데 무조건 부모의 말을 잘 듣는 약이 개발되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이 약을 어떤 부모가 구입하겠는가?
그냥을 먹으면 부모 말에 순종하게 되는 그 약을 누가 사겠는가? 그 약을 먹고 순종하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순종이다. 순종이 아니라 복종 일수 있다. 순종은 자발적인 것이다.
자녀에게 자유의지가 없어지는 거나 마찬가지다. 어느 부모가 알약을 먹이면 말 잘 듣는다고 해서 그 약을 먹일 부모가 있겠는가.
또 부모가 아이들에게 숙제해야 한다고 얘기할 때, "00야 숙제 다했니?", "잠시만요!", "그래 빨리 해야지!" 또 시간이 흐르고 나서 부모가 자녀에게 "숙제 다 했니?", "잠시만요, 조금 있다가요.", "얼른해라~!"
그런데 또 안 하고 미루고 결국 혼내게 된다. 그런데 다음날에 당연히 숙제를 안 했겠지 하고 "00야 숙제 얼른 해라! 미루지 말고~" 라고 말했는데 자녀가 "네 엄마, 미리 숙제 다했어요."라고 말할 때 그 느낌, 그 기쁨을 생각해보라.
이것이 거듭 말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마음이 아닐까? 약 먹고 아이가 엄마 말을 잘 듣는 게 아니라 우리가 약을 먹고 하나님 말씀에 복종하는 것이 아닌, 우리의 자발적 순종으로 미리 숙제를 마칠 때,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선택할 때, 부모가 흐뭇해하고 기쁜 것처럼, 하나님도 기뻐하신다.
우리가 죄를 지을 수 있지만 자발적 순종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 자녀가 하나하나 해결하고, 책임을 지는 그런 건강하고 성숙한 자녀가 되는 것.
이 개념을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한다. (자유의지를 설명하기에 조금 부족할 수 있지만 가장 좋은 예라고 생각하고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설명함)
정리를 좀 하자면, 선악과는 자유의지에 대한 상징이고, 자유의지가 없었으면 선악과를 만들 이유가 없었고, 자유의지가 있었기에 선악과라는 선택의 범주가 있었던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안에 관계, 부모와 자식관계처럼, 관계 설정이 되게 되었고,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아버지는 우리에게 자발적 순종을 원하시는 것이다.
또 중요한 것은 사랑과 순종의 관계에서 순종이 우선이 아니라 사랑이 우선이다. 하나님은 뜬금없이 자발적으로 순종해! 가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우리를 만드시고 우리를 순종하는 자로 원하신다.
부모가 사랑해서 자녀를 낳고 그 자녀가 부모에게 무조건으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발적 순종을 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시작되었고 그리고 선택권도 주신 것에 감사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자신의 모든 것을 주시고 심지어 아들까지 주신 것처럼. 자유의지는 우리에게 엄청난 선물이다.
그리고 우리가 선악과만 이야기하는데 생명나무가 있다. 생명나무는 뭘까? 불로초일까? 천사가 화영검을 두어서 생명나무를 못 따먹게 했던 그 나무 생명나무가 뭘까.
그 생명나무의 기능적인 역할은 그리스도적인 기능이 있다.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과 분리가 됐는데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그 분리가 다시 이어지는 것이니 그건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
선악과 이야기만 해서 생명나무이야기를 스쳐 지나가게 된다. 생명나무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다.
그리고 진짜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하고 싶다. 선악과 이야기가 나왔으니, 죄에 대해서도 반드시 이야기해야 한다. 선악과를 왜 따 먹었나? 내가 하나님처럼 되려고? 선악과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자 통치자라고 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심판자, 통치자의 권한을 위임하셨다. 그런데 그것을 인간이 완전하게 소유하고 싶었다. 나 이제 하나님 필요 없다. 내 인생에 주인은 바로 나다. 이것이 죄의 본질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셔서 그것으로 순종하기 원하셨는데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인해서 하나님과 단절하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가 주인이 되려고 했다. 내가 내 마음대로 살겠다. 내가 주인이 되겠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안 따먹었으면 우리가 지금 이 고생을 안 하고 산다는 말이 있다. 매일 우리는 아담 탓을 한다. 인생은 B와 D사이에 C다. 이런 말이 있다. 태어남과 죽음 사이에 선택이 있다. 자유의지는 한마디로 선택이다.
우리가 굳이 창세기 때 아담 하와를 탓할 필요가 없다. 지금 우리가 눈뜨면 선택을 해야 한다. 이거 할까? 저거 할까? 우리는 매일 어찌 보면 선악과를 내가 내 인생에 주인이 되겠다는 선악과를 따먹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담과 하와를 탓하지 말자.
실제로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하나는 언약. 약속이다. 언약의 핵심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조건은 우리의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순종할 때. 그러면 그 언약 안에 우리가 거하게 된다.
그러니깐 하나님을 선택해서 순종하면 우리의 삶은 단순해진다. 계속 하나님을 선택하고 살아가려고 하는 것 이것이 신앙인의 기본자세이다. 늘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내 주인 됨을 고백하는 것이다.
결론
에덴동산 가운데 선악과가 있었다. 그 옆에 생명나무가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리 인간 개개인 가운데 가슴 가운데 마음 가운데 인생 가운데, 다 각자의 생각과 소견과 선택의 권리가 있다. 그 가운데 중심에 생명나무와 선악과가 있다. 그 둘 중에 어떤 것을 선택하는 것은 여러분의 몫이다.
이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을 순종하고 하나님을 따르는 것을 거부하는 많은 사람들 중에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을 순종하면서 살면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선악과는 선물이다. 선악과는 시험 거리나 저주, 테스트라고 표현하는데 아니다. 자유의지 때문에 있는 선물이다. 자유의지를 활용해 우리가 철이 들고 성숙해지는 자녀가 되자. 하나님 보시기에.
이제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자유의지를 맘껏 누리시되 책임 있는 행동을 하시고 꼼수 부리지 말고 역이용하지 말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한다. 나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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