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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보다 사랑‘
요한일서 4장 17-19절
17절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되었다는 사실은 이 점에 있으니, 곧 우리로 하여금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담대해지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신 대로 또한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살기 때문입니다.
18절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두려움은 징벌과 관련이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19절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20절 누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21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자매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계명을 주님에게서 받았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명령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서로 사랑하라? 정답은 두려워 말라입니다. 두려워 말라가 가장 많이 나오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만큼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두려울 일이 많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죠.
흔히 믿음을 가지고 살면 두려울 일이 없어지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불안은 없어질 수 있어요. 불안은 우리가 기도하고 그러면 없어질 수 있지만, 두려움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두려워 말라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많이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을 받은 사람들은 예수님 잘 믿는 신앙 공동체 내부에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깐 우리가 잘 믿는다고 해서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살아갈 사명이 있다는 뜻으로 읽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믿으면 하나님이 두려움을 없애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음이 있기에 두려운 세상 속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가기를 하나님은 원하신다는 것이죠.
여전히 우리에게 두려운 일들이 많죠, 전 세계를 뒤엎은 코로나, 질병의 문제, 개인의 막막한 삶, 보이지 않는 미래, 불안, 참 많은 두려움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말로는 주님의 이름으로 세상을 이기며 살아간다 하지만 오늘 이겼는데 내일 또 싸워야 되는 게 우리 현실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말씀은 솔직히 쉽지 않습니다.
요즘 전 세계적으로 말하는 게 있습니다. 기후위기입니다. 이건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굉장히 냉철하게 살펴봐야 할 이슈가 됩니다. 우리나라에 유명해지지 않은 책인데 2050 거주불능지구라는 책이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굉장히 화제가 된 책입니다. 이 책은 코로나 전에 나온 책인데 생태학과 사회과학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매우 절망적인 앞날을 예측한 책입니다.
이런 목차들이 있습니다. 살인적인 폭염, 빈곤, 해수면변화, 산불, 극단적인 날씨, 갈증과 가뭄, 해양오염, 대기오염, 신종바이러스, 무너지는 경제, 이런 파국으로 인해 벌어지는 사회시스템 붕괴, 자본주의 위기, 기술의 종교화, 절망 끝에 허무주의, 회피, 금욕주의 등등. 많은 시나리오들을 적어놓고 있습니다.
또한 ‘IPCC’라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라는 단체가 있는데 1년 전에 보고서를 냈습니다. 기후변화는 돌이킬 수 없는 위기다. 2030~50년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시점이 온다고 보고서에서 적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것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믿음으로 이길 수 있다?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을까요? 물론 이런 예상들이 늦춰지길 바라지만, 그것보다 우리가 직면해야 합니다. 더 많은 위기와 재난 속에서 어떤 삶을, 어떤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지 같이 고민해야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사랑의 반대말을 미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사랑의 반대말은 두려움입니다. 왜냐면 모든 미움의 시작에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깐 우리는 두려움을 잘 다스려야합니다. 두려움을 그대로 두면 분명 미움으로 커져서 사랑의 영역을 침범해버립니다.
두려움을 다루는 방법은 두려움을 제압하는 힘도 아니고, 두려움으로부터 벽을 쌓아서 회피하는 것도 아니고 사랑으로 두려움을 이겨내는 것이 라는 사실입니다.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사랑이 아닌 다른 방법은 또 다른 두려움을 파생시킬 뿐입니다.
참 근데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은 약한 존재라서 두려움을 이겨내기 힘듭니다. 우리는 그래서 저마다 심리적인 방어기제를 발현시킵니다. 그 대표적인 방어기제가 미움입니다. 다른 말로 혐오, 증오입니다. 사람들은 내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미움의 대상을 본능적으로 필요로 한다고 합니다.
내가 불안감에 휩싸이는 것보다 누군가를 혐오함으로 나의 불안을 더는 것이 덜 고통스럽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증폭되면, 두려움의 감정이 개인이 아니고 확산될 때 굉장히 끔찍한 일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런 세계사의 비극은 많습니다.
1930년대 일본 관동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두려워서 조선인을 혐오했습니다. 희생양을 찾습니다.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탔다고 혐오했습니다. 그리고 2차 대전 당시에 불안한 국제정세 속에서 나치라는 괴물이 튀어나왔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이처럼 사랑의 반대말은 두려움입니다. 두려움과 사랑은 본문 말씀처럼 결코 함께 갈 수 없습니다. 두려움이 사랑을 이기고 있던지, 사랑이 두려움을 이기고 있던지. 둘 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두려움을 느낀다고 해서 내 잘못이 아니라고 그저 감정을 내버려두면 안 됩니다. 두려움을 다스리는 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입니다. 비관적인 미래 앞에서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두려움 안으로 숨을 것입니다. 아니면 두려움을 잘 다스릴 것인가.
여러분 살면서 사소한 사랑이나 작은 사랑이 두려움을 뛰어넘어 이겼던 경험은 없으십니까? 오늘 17절에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함이니, 하늘과 땅이 흔들리는 심판의 날에 그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사랑의 힘이라고 성경이 말합니다. 두려움을 이기는 것은 두려움보다 강한 장비나 무기가 아니라 내가 진정 사랑하고 있느냐 하는 겁니다.
베드로전서 4장7~8절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재앙과 재난의 두려움과 우리를 지탱했던 일상과, 우리의 가치가 뒤집혀지는 종말의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같이 기도하고 사랑한다면 우리 안에 있는 죄와 허물들, 서로 미워하는 마음들, 두려움 앞에서 약해지는 모든 것들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사랑의 힘입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근데 말이 쉽지 무슨 마법처럼 한 번에 두려움을 몰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끊임없는 연습, 훈련이 필요합니다.
기후 위기나 재난이 닥칠 때 그 재난이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뉴스로 알게 됩니다. 폭염이 닥칠 때 에어컨 없는 사람이 힘들어집니다. 전염병 기후위기에, 선진국이 백신을 먼저 받습니다. 이번 홍수 때 가난한 사람들이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일이 더 많아질 겁니다.
약한 사람들, 마음 상한 사람들, 나와 다른 사람들, 차별받고 혐오 받는 사람들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는지, 재난에 상황 앞에서 내가 살기 보다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그런 사람들에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할지 생각해야합니다.
한국교회가 취하는 자세가 벽을 쌓는 자세인지, 벽을 허무는 자세인지 돌아봐야합니다. 코로나가 한창일 무렵에 독일 노트라인 베스트팔렌 교회 협의회에서 작성한 코로나 기도문을 읽어드리겠습니다. “근심 속에서도 다른 이들의 시선을 놓치지 않게 하시고, 나보다 남을 편들 수 있는 담대함을 주십시오.
요즘 개인이 중요한 시대입니다. 그럴수록 우리가 남의 편에 서는 연습을, 사랑하는 연습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이들의 시선을 놓치지 않고, 나보다 남의 편이 되어주고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혐오하지 않고 희생양을 만들지 않는 것. 두려움에 두려움으로 맞서지 않고 두려움의 벽을 쌓지 않는 것.
이것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이 사회에 앞으로 올 비관적인 미래가운데 우리가 적용시켜나가는 연습이라는 거죠. 여러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다행히 그것을 우리 보고 알아서 하라고 하나님이 던져놓지 않으십니다. 1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우리가 사랑의 힘으로 벽을 허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의지,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할 소망이며 담대함에 원천입니다.
사랑의 힘으로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을 이기는 사랑의 힘은 우리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고, 아니 우리로부터 나와서도 안 되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힘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우리입니까? 하나님을 배반한 우리이고 죽어 마땅한 우리입니다.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차별 없이 먼저 사랑하셨고, 사랑할만한 가치 없는 이들을 사랑하셨습니다.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주셨다는 것을 요한 일서에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마무리 정리 하겠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우리는 사랑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혐오의 대상,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 멸망의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와 상관없이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주시고 멸망의 끝으로 내몰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우리의 두려움을 껴안아 주셨습니다.
재난의 시대에 두려움을 사랑으로 이기는 것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두려움 없이 사랑으로 이겨나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더 묵상하는 연습이 더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을 이기는 연료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헨리 나우웬이 이런 말을 합니다. 기도는 두려움의 집에서 나와 사랑의 집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기도는 두려움에 찬 세상에서 불안 대신 사랑을 선택하고, 마음 문을 열어 사랑하시는 분의 친밀한 임재 안에 거하는 방법이다.
이 시간 잠시 우리 마음을 모아서 묵상하겠습니다. 그림을 하나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한번 응시해보시죠. 지거쾨더라는 신부님이자 화가가 그린 작품입니다. 제목은 사랑의 영이라는 작품입니다.
이 그림을 잘 보면 가운데를 잘 쳐다보면 뭔가 빠져드는 느낌을 받습니다. 우리가 우리 속에 두렴움을 내려놓을 수 있는 방법은 먼저 우리가 하나님 사랑 안에 잠기는 것이죠. 모든 것을 끌어안는 사랑의 힘.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힘입니다.
세상에 힘과 무기로 우리를 지키는 강한 능력이 아닙니다. 이 그림에는 어떤 강한 벽도, 무기도 없습니다. 약해보이고 부드러워 보이지만 온전히 우리를 끌어안고 휘감아 지키시는 하나님의 선함을 읽습니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이 시간 기도하겠습니다. 앞으로 마주할 세상이 두려워 보인다하더라도 미움에 미움으로, 두려움에 두려움으로 맞서지 않게 하여주소서. 하나님의 사랑의 힘을 가지고 그 두려움을 이겨나가며 한걸음, 한걸음 두려움보다 사랑을 선택할 수 있는 우리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내 안에, 우리 안에 두려움을 온전히 하나님 사랑의 품에 내어놓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더욱 부어주시고 그 사랑으로 벽을 쌓기보다 길을 만들고, 힘들어가는 세상, 어지러운 세상 가운데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우리의 모든 두려움들을 이기고 세상을 섬기며 살아갈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게 하소서. 사랑의 근원되신 주님을 의지합니다. 감사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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