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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을 보시는 하나님Bible 2023. 7. 25. 13:38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관심이 있으실까?
그러나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셨다. "너는 그의 준수한 겉모습과 큰 키만을 보아서는 안 된다. 그는 내가 세운 사람이 아니다. 나는 사람이 판단하는 것처럼 그렇게 판단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겉모습만을 따라 판단하지만, 나 주는 중심을 본다." 사무엘상 16:7
하나님께서는 사울 왕을 버리시고 이제 다윗을 왕으로 세우려고 작정을 하십니다. 그래서 사무엘 선지자를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사무엘에게 한 가지 임무를 수행하게 하십니다. 너는 가서 내가 너에게 지명하는 그 아들에게 기름을 부어서 왕으로 세워라. 사무엘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그 임무를 수행하지요.
드디어 베들레헴에 도착해서 이새의 가족을 그 재단으로 초대합니다. 함께 주님께 제사를 드리게 됩니다. 이새의 가정에는 출세의 기회였습니다. 사울을 왕으로 세운 이 선지자가 우리 집에 와? 나도 이 촌구석에서 탈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가 아닌가? 사무엘에게 잘만 보이면 언젠가 나를 기억해 주실 거야. 나도 이 기회를 잘 잡아서 내 인생의 승부를 걸자. 자기의 최고의 모습을 갖추고 사무엘 앞에 펼쳐진 그 제단 앞으로 한 사람 한 사람씩 대비하며 등장했을 것입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아들 엘리압이라는 장남이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그의 키와 용모가 뛰어났으며 어느 정도 추측이 됩니다. 근데 어떤 분들은 이미 여기서 실족하십니다. 용모에 대해서 칭찬하는 건 이해가 가는데 왜 키에 대해서 칭찬하십니까? 그런데 여러분 키라는 것은 고대 시대 왕에게는 필수조건필수조건이었음을 잠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고대 시대에 왕의 역할 중 가장 중요한 역할이며 전쟁터에서 군사들과 함께 싸우는 게 왕의 역할이었습니다. 요즘에 우리가 생각한 왕은 청와대 앉아서 정치하는 역할이지만 고대시대의 왕은 정치도 하지만 또 다른 역할은 전쟁터에서 돌진! 했을 때 제일 먼저 전쟁터에 한 발을 내딛는 사람들이 왕들이었어요.
그러면 왕이 전쟁터에서 사용하고 소지하는 그 검, 칼이 매우 중요합니다. 근데 그 검의 길이는 사람의 신장에 비례합니다. 사람의 키가 크면 클수록 검에 길이도 길게 만듭니다. 근데 검의 길이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전쟁터에서 유리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용모가 매우 좋고 키가 컸다는 것은 왕이 될 만한 모든 스펙이 다 갖추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보기에도 “와 이 사람은 쓰임 받을 만해”,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해”, 혹은 지금 우리로 말하면 이 예배는 주님께서 받을 만해, 이 선교 활동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해, 하나님께서 이 정도 사람이 되면 세계적인 종이 되게 하실 거야. 근데 하나님께서 한 마디로 그 사람을 거절하십니다. 뭐라고 말씀하시나요.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사람들이 보낸 기준으로 하나님을 평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표면을 보거니와 그를 뜻함을 보거니와 쓰임 받을만함을 보거니와 화려함을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사무엘상 16:7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딱 한 가지입니다. 중심. 그런데 여기까지 말씀을 드리면 많은 분들은 이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목사님 그거 수없이 많이 듣고 와서 어려서부터 아는 사실인데 도대체 중심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중심 그러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진심 혹은 마음가짐을 생각합니다.
근데 원어 적으로 중심이라는 단어 히브리어는 ‘레브’, ‘레바브’라는 단어고요. 헬라어로 신약에 와서는 ‘칼디아’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 두 단어 안에 담겨 있는 중심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사실 우리말로는 번역이 불가능한 단어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의 오늘 말씀의 이해를 조금 돕기 위해서 그래도 가장 적합한 단어를 하나 선택하고자 한다면 감성, 감정, 마음가짐, 혹은 진심이라는 표현보다는 ‘동기’라는 단어가 가장 정확합니다.
다시 한번 이 구절을 읽으면 이런 뜻이 되겠지요.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즉 그럴듯함을 보거니와 “이야! 저 정도 사람이라면 하나님 받으실 만해, 저 정도 찬양, 저 정도 고백이라면, 저 정도 헌금이라면 하나님 반드시 기뻐하셨을 거야 야 저 정도 사람이라면 쓰임 받을 만해“ 그런데 하나님은 그거 보지 않고 그 사람의 동기를 보시네요. 바로 이런 뜻입니다.
너 왜 예배드리니? 너 왜 신앙생활 하니? 너 왜 단기선교 여행을 가려고 하니? 너 왜 일평생을 주님께 드린다고 하니? 사람들은 다양한 이유로 주님을 찾는 경향이 있습니다. 주님을 통해서 복 받고 주님을 통해서 잘되고, 십일조 열심히 내서 내 사업 보장받고 새벽기도 열심히 지킴으로 내 건강 보장받고, 교회생활 헌신 열심히 내가 이루어 내 자녀의 축복을 보장받고,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결국 주님께 드린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을 위해서 한 행위라는 것을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날 재단 위에 올랐던 이새의 아들들은요. “중심” 다른 말로 동기가 잘 못 되었습니다. 나도 저 왕궁에 들어가고 말 거야, 나도 출세하고 말 거야, 나도 이 촌구석에서 벗어나고 말 거야, 나도 인생을 한바탕 의미 있게 살고 싶어, 나도 이 무의미한 인생 벗어나서 조금 더 화려한 인생 살고 싶어, 하나님께서 그 모두를 거절하셨어요. 그 모든 예배를 거절하셨습니다. 그 모든 섬김과 헌신도 거절하셨습니다.
그런데 참 희한한 것은 딱 한 사람만 그날 펼쳐진 데뷔의 기회에 관심이 없었던 것 같아요. 누구죠? 다윗이에요 뭐 하고 있었어요? 혼자 밖에서 양 치고 있었어요. 어떤 분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그것은 다윗이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서 할 수 없이 양을 치고 있어서 그런 거죠. 근데요 여기서 한 가지 말씀드리면, 그 이야기는 요셉의 이야기고요. 다윗의 이야기와 요셉의 이야기하고 헷갈리면 안 됩니다. 다윗이 형들에게 미움을 사서 양을 쳤던 기록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다윗은 선택한 것이었을 거예요. 왜 다른 사람들 다 데뷔의 기회를 찾아서 최고의 모습을 갖추고 사무엘 앞에 등장했을 터인데 왜 다윗은 그날 양치기로 작정했을까요? 오늘 이 말씀에서는 다윗의 중심을 깊이 들어가기는 쉽지 않을 수 있어도 나중에 다윗이 한평생에 걸쳐 부른 그 노래에 다윗의 마음, 중심을 어느 정도 우리가 알 수가 있어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편 23편)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 도다. (시편 62편)
다윗은 살아생전 자기 목숨까지 위협하며 괴롭히던 사울을 비롯한 그 주위 사람들에 대해 복수하지 않고, 심지어 그들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적일지라도 추후 자신에게 돌아오거나, 돌아오지 않았더라도 하나님이 기름 부은 자들에 관한 한 직접 나서서 복수하지 않는다는 마음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다윗의 마음에는 즉 다윗의 중심에는 동기에는 나의 복수심이 아닌 하나님이 꽉 차있었습니다.
하나님 나 저 왕궁의 안 들어가도 괜찮아요. 출세 안 해도 괜찮아요. 오늘 뭐 특별한 일 없어도 괜찮아요. 인생의 대박을 치지 않아도 괜찮아요. 오늘 하루아침에 시작해서 하루의 일과를 마칠 때 또 하루가 이렇게 지나가는구나 하고 그냥 소박하게 끝나도 괜찮아요. 근데 오늘 이 초원에서 내가 양을 치면서 주님으로 내 자신을 더 채워 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행복해요. 즉 다윗의 고백은 '주님 한 분 만으로 나는 만족합니다.' 인지 모르겠어요.
결국 사무엘 선지자가 다윗을 불러서 기름 부으십니다. 다윗이 왕이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럴듯한 사람들, 무대 위에 올라온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을 누리고 있는, 다른 말로 하나님이 내 인생의 동기가 된 사람들에게 주님의 시선이 고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하는데요, 잘 아시는 대로 다윗은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랬던 그가 간음죄와 살인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요? 하지만 다윗은 죄를 범한 이후의 태도. 그런 엄청난 범죄, 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즉각 선지자 나단의 통렬한 지적을 받고 바로 회개했다는 것입니다.
말은 쉽지만 한 나라의, 온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칭찬받던 왕이 한 선지자 앞에 무릎 꿇고 그 자리에서 바로 회개하는 게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게 다윗의 다윗 됨이에요. 죄를 부인하거나 잡아떼거나 선지자를 죽이거나 그렇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 죄를 들여다보게 하셨을 때 그는 즉각 그 죄를 인정하게 됩니다. 나의 위치 나의 명예 나의 권력보다 하나님이 더 크시기에 이렇게 나단 선지자 앞에 즉각 반응할 수 있었던 다윗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다윗처럼 죄를 짓던, 어떤 선택에 기로에 서있던, 하나님을 예배할 때 던, 공부할 때던, 일을 할 때 던, 나보다 주님을 먼저 생각하고 주님의 관심이 가는 곳에 나의 관심이 가기 원합니다.라고 기도합시다. 주님만이 나의 인생의 동기가 되도록 은혜를 부어주세요.라고 기도해 보면 좋겠습니다.
찬양
이길승 - 주님 한분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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