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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눈으로 보자Bible 2020. 5. 2. 14:37
믿음의 눈으로 보자!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그 땅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민수기 14장 8절 말씀)
“다만 여러분은 주님을 거역하지만 마십시오.
여러분은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그들은 우리의 밥입니다.
그들의 방어력은 사라졌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민수기 14장 9절 말씀)오늘 본문 앞부분을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각 지파 지도자들을 뽑아 가나안 땅을 탐색하고 정탐하라고 말씀하신 후에 12 정탐꾼을 보내어 40일 동안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왔습니다.
그런데 10명의 정탐꾼들은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이 아주 큰 사람들이고 강한 사람이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다. 우리는 그들 앞에서는 메뚜기와 같다. 라고 보고합니다.
(그랬더니 이스라엘 백성이 또 아이고 밤새 통곡을 하며 차라리 이집트 땅에서 죽었더라면, 차라리 광야에서 죽겠다고 하고, 이집트로 돌아가자고 난리 통곡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12 정탐꾼 중에 2명인 여호수아와 갈렙이 슬픔에 잠겨 자신들의 옷을 찢으며, 그 백성들을 향해 외칩니다. 우리가 탐지하려고 두루 다녀 본 그 땅은 매우 좋은 땅입니다.
그다음 본문 말씀 8-9절이 그들의 외침이었습니다. 오늘 이 본문 말씀을 통해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본 2명의 정탐꾼이 아닌, 10명의 정탐꾼들은 어떤 것을 보고 생각을 했는지 우리 모습을 빗대어 살펴보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12명의 정탐꾼들이 40일 동안 똑같이 정탐하였습니다. 그런데 10:2로 다수와 소수의 의견으로 갈렸습니다. 10명은 너무 크고 세다. 불가능하다. 2명은 아니다 괜찮다 올라가자. 그 땅은 좋은 땅이다. 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보낸 것이 누구입니까? 그전에 홍해에서 건지신 게 누구입니까? 모세입니까?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가나안으로 보내신다고 약속하셨는데도 불구하고, 그 땅은 강하고 거기 사람들은 크고 강하다고 이야기하면서 불평하고 불순종하게 됩니다.
이집트의 10 재앙과 홍해 사건을 보고도,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자기들의 판단에 생각에 갇혀버렸습니다. 13장 28절 말씀처럼 그러나 가보니 그 땅은 강하다 성읍은 견고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3장 31절에 또 자기 스스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도저히 그 백성에게로 쳐 올라가지 못합니다. 그 백성은 우리보다 더 강합니다.라고 판단해버립니다.
이집트는 더 크고 더 강한데 벌써 까먹었나? 아무튼 가나안에 사는 사람들은 엄청 큰 사람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은 크다는 것, 크기 그것을 보고 자기의 해석이 들어간 것입니다.
쟤들은 우리보다 커서 우리가 진다. 가나안으로 우리는 들어갈 수 없다.라고 판단해 버립니다.
정탐꾼들은 판단을 전하는 게 아니라 판단을 할 수 있게 객관적인 보고를 하라고 정탐을 보냈는데 자기 판단을 모세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깐 이스라엘 백성들이 소리 높여 아우성치고 밤새도록 통곡한다고, 14장 1절에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는 가나안 땅 사람들이 크다는 것, 그 사실을 곧 진실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내가 보고 있는 어떤 사실을 가지고 그걸 진실인 냥 전달해서는 안 되는 거고, 또한 우리는 진실을 전할 능력이 사실 없는 사람입니다.
크다고 다 이기고 작다고 다 집니까? 크다고 좋은 교회고 작다고 안 좋은 교회입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판단을 조심하라고 하는데 이 10명의 정탐꾼들은 모든 사람 앞에서 자신들의 판단, 편견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럼 10명의 정탐꾼들은 왜 그렇게 안 된다고 했을까요? 일단 두렵고 불편하니깐 하기 싫으니깐 가지 말자고 한 것입니다.
자기의 기준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게 무슨 얘기냐.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바라볼 때, 어떤 기준을 두고 비교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집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은 크기에 관점을 가졌기 때문에 그 크기를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때 당시 리더를 세울 때, 전쟁을 할 때면 일단 키부터 큰사람을 왕으로 리더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사람 수가 많은 것이 노동이나, 전쟁에 아주 중요한 시대였기에, 10명의 정탐꾼들도 마찬가지로 크기를 기준 삼았기에 가나안 땅은 안 된다고 판단까지 내린 것입니다.
물론 큰 사람들이랑 싸우면 무섭겠지만, 10가지 재앙에서 애굽에서 탈출시켜주신 하나님,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보호해주신 하나님.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을 방금 보고도 망각하고 하나님의 능력 믿음의 눈을 기준 삼지 못한 것이 10명의 정탐꾼의 잘못된 생각과 기준이었습니다.
크기를 기준 삼으면 당연히 크고 작은 것이 문제가 되고 넓이로 기준을 잡았으면 넓고 좁은 것이 문제가 되겠죠?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외모, 성적, 스펙, 나이, 시간, 경력, 체력, 등등 그러한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크고 길고 무거운 것에 기준을 두지 말았으면 좋겠고, 외모, 성적, 스펙, 나이, 시간, 경력, 외모, 성적, 스펙, 나이, 시간, 경력, 등등의 기준들을 뛰어넘는 믿음의 기준, 믿음의 눈으로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내가 살면서 경험한 것 본 것 들은 것이 진실이라고, 맞다. 라고 아무 기준 없이 생각하고 행동하게 된다면, 내가 지칠 때 두려울 때 힘들 때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금방 포기하게 되고 그 문제를 더 안 좋게 보고 판단하고 편견의 시선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 행동은 믿음의 행동이 아니 것입니다. 사실 저도 잘 안됩니다. 이야 진짜 번쩍번쩍하네, 내가 저 사람들을 위해 이 정도는 해줘야 하지 않을까? 세상적인 가치관에서 생각을 많이 하지, 정말 진심과 진리는 통하기 마련인데 그런 부분을 많이 놓치고 있는 제 모습도 보게 됩니다.
또한 13장 33절에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았지만, 그들의 눈에도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편견을 넘어서 이제는 자기 연민과 염려, 불안을 보여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그들이 메뚜기로 볼지 메미로 볼지 파리로 볼지 사마귀로 볼지 누가 알겠냐고요. 저 사람들은 우리보다 크기 때문에, 그 크기를 문제 삼아 나보다 큰사람을 보고 나를 작게 보는 열등감까지 생겨서 우리가 보기에도 메뚜기 같아 보인다. 또 그들의 눈에도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제대로 된 기준이 없을 때는 어리석은 판단을 하게 되고 그 판단으로 인해 잘 안될 때 힘들 때 무서울 때는 자기 비하 또는, 열등감은, 자기 연민까지 오게 됩니다.
자기 연민은 교만보다 나을 것이 없다고 합니다. 정탐꾼들은 믿음의 눈으로 보지 않고 자신들을 메뚜기라 일컬었습니다.
이런 자기 연민이 결국 백성들이 통곡하게 되고 결국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가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생각 전체를 바꾸는 연습?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연습을 잘 안되지만 해야 됩니다.
500년 전에 생각을 제대로 바꾼 인물을 소개하겠습니다. 누군지 맞춰보세요. 왜 500년 전에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했습니까?
젊은 신부가 어떻게 교황을 향해서 선전포고를 했을까요? 그 로마 교황이 작아 보이고 하나님이 더 커 보이고 로마 칙령이 가벼워 보이고 성경이 더 무거웠기 때문입니다. 기준이 달랐던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상가교회? 시골교회? 작은 교회? 그러나 이 교회가 작다고 생각하면 한없이 작아집니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목사님의 열정적인 설교와 성도님들의 헌신과 평신도의 사랑과 섬김이 있기에 우리 교회는 작은 교회가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이 계시는 교회이며, 하나님이 계시는 교회가 큰 교회고 바른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우리도 다수의 의견 10명의 정탐꾼 속에 2명의 정탐꾼이 믿음의 눈으로, 믿음의 기준으로 이야기하고 생각했던 것처럼 이 시대를 믿음의 눈으로 살게 되길 바랍니다.
여러분 이제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10 vs 2 다수의 의견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소수의 의견이 맞을 때가 있고 소수의 생각이 모여 세상을 바꾸기도 합니다.
또한 같은 상황을 보고도 나의 의견이 나의 고집이 나의 편견이 나의 해석이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하고, 나의 연민 나의 열등감 자기 비하하지 않고 나의 상황이나 세상을 바라볼 때 믿음의 관점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은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여러분 그 어떤 것도 하나님과 비교한다면 이 세상은 먼지요. 티끌입니다. 믿음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이 작아 보이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에 대단한 거 부러워할 거 없습니다. 세상 사람의 기준으로 살면 내가 더 힘이 듭니다. 진짜 믿음의 눈을 뜨고 세상 사람들과 싸우지 말고 오히려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윽한 마음, 사랑의 마음으로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여러분 진짜 마지막으로 딱 한 명 더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인생 수많은 고통과 절망 가운데 맹인이지만, 육신으로는 보지 못하지만 믿음의 눈을 뜨고 믿음의 삶을 살아간 한 여자의 인생을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나는 누구일까요? 시인이자 작사가 죠니 크로스비의 이야기입니다. 한평생 맹인으로 은혜로운 찬송가 10,000여 편의 찬송 시를 쓴 세계 최고의 찬양 전도자이자 찬송가 시인 패니 재인 크로스비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찬송가 204장)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찬송가 219장)
"인애하신 구세주여"(찬송가 337장)
"나의 갈 길 다가도록"(찬송가 434장)
"오 놀라운 구세주"(찬송가 446장)
"나의 영원하신 기업"(찬송가 492장)
"예수 나를 위하여"(찬송가 144장)
"나의 생명 되신 주"(찬송가 424장)
"주가 맡긴 모든 역사"(찬송가 231장)
"찬양하라 복되신 구세주 예수"(찬송가 46장)
"찬송으로 보답할 수 없는"(찬송가 43장) 등...돌팔이 의사의 잘못된 약물 치료로 패니 크로스비는 생 후 6주부터 95세까지 맹인으로 평생,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눈이 멀게 된 이후 제대로 의사의 치료를 받아보지 못했습니다. 패니가 한 살 되었을 때 그를 극진히 사랑하던 아버지 존 크로스비까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패니의 엄마가 늘 생활고로 바빴기 때문에 패니는 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았으며, 할머니는 패니의 좋은 친구이자 선생님이었으며 그녀의 손과 발이 되어주었다.
할머니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패니가 눈으로 보는 것처럼 상세하게 설명해 주면서 성경말씀과 접목시켰다. 패니가 11살 되었을 때 패니를 누구보다 가장 사랑하고 아끼던 패니의 할머니 유니스 크로스비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1834년에 뉴욕 입법부와 맨해튼에 새로 생긴 맹인학교에 전액 장학생으로 등록했다. 패니 크로스비는 성장해서 유명한 시인이 되었고 유명한 찬송가 작사자가 되었습니다.
맹인 교수 밴 앨스틴과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패니 크로스비가 38세 되던 해인 1858년 3월 8일이었습니다. 서로에 대 한 깊은 헌신과 사랑으로 시작한 결혼, 결혼 후 곧 아기 출산.
그러나 곧 아기를 잃고 말았습니다. 패니 크로스 비의 일생에서 가장 슬픈 일이 1859년에 일어났습니다. 아기를 잃고 이런 고백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아기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천사들이 내려와서 우리의 아기를 데리고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아기를 하나님과 그분의 왕좌에 맡겼습니다.” 그 이후 계속적으로 그녀는 남편을 주신 것에 항상 감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남편도 아내를 떠나 먼저 하늘로 갔습니다. 패니 크로스비는 95세를 일기로 조용히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맹인이기를 원합니다. 내가 제일 먼저 볼 얼굴이 주님의 얼굴이기 때문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됨
찬양 : 예수, 늘 함께 하시네
기도
하나님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늘 의견이 다르고 소수와 다수의 의견 차이가 있습니다. 10명의 정탐꾼 다수가 하는 말이 틀릴 때도 있고 2명의 정탐꾼의 말이 맞을 때가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복음, 이 성경 말씀을 읽을 때, 우리는 다수의견이 늘 옳지 않다는 것도 알 수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세상 사람들의 관점 세상의 눈으로 바라보기보단, 믿음의 관점 믿음의 프레임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가길 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기에 이 세상이 안 부럽고 이 세상이 안 크더라 고 생각을 하며 당당하고 자신 있게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믿음의 관점으로 세상과 상황과 사람을 보며, 본다고 하나 보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늘 믿음의 눈으로 새로운 것을 보며 감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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